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본토 공습 (문단 편집) === [[커티스 르메이]]의 등장 === 1945년 1월, 유럽전선과 중국의 제20폭격기사령부를 거쳐, 일본 본토 폭격의 최적임자로 거론되어 몇 달만에 다시 제21폭격기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온 사람이 있었다. 미 육군항공대 소장 '''[[커티스 르메이]]''' 장군이었다. 부임 후 르메이는 핸셀이 하던대로 고고도 정밀폭격을 해봤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었고, 참다 못해 기존의 일본 본토 폭격작전을 분석한 결과 '''"고고도 정밀폭격 집어치워!"''' 라는 결론을 내린다. 르메이는 고고도 정밀 폭격으로 폭격작전을 진행했던 핸셀 본인에 대한 비난은 일절 꺼내지 않았다. 핸셀이 주장한 고고도 정밀 폭격 역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기엔 아직 기술력이 부족하다는 불가항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르메이 본인도 저고도 폭격으로 전환하기 전에는 핸셀과 같은 방법으로 같은 목표에 고고도 정밀 폭격을 수차례 시도한 바가 있지만 역시 죽을 쑤었다. 르메이가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은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 정밀 폭격은 당연히 날씨가 쾌청할 때 제일 효과가 좋다. 하지만 일본 상공에서 정밀 폭격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날씨가 충분히 쾌청한 날은 보통 나흘, 아무리 많이 봐줘도 한 달에 1주일밖에 되지 않는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s-4.1|원자폭탄이 투하될 때]] 3개 목표 중 하나였던 고쿠라가 목표에서 제외된 이유가 바로 짙은 구름 때문에 시계가 차단되어서였다. 구름이 많이 끼면 레이더를 이용한 폭격으로 전환해야 하니 정확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핸셀이 부득이하게 레이더를 이용한 폭격을 가했을 때는 공장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옆의 항구를 일부 손상시키는 정도의 매우 경미한 피해밖에 주지 못했다. * 아무리 맑은 날에 최신예 정밀폭격용 관측기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정밀폭격의 명중률은 저고도 폭격보다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일본군 방공망이 도달할 수 없는 안전고도에서의 폭격시에는 '''제트기류로 인해 안 그래도 떨어지는 명중률이 개판'''난다. 폭탄의 비행 궤적이 흔들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폭격기도 크게 흔들리거나 경로 유지가 매우 힘들어진다. 게다가 뒷바람을 맞으면 노던 조준기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속도가 빨라져버리고, 맞바람을 뚫고 가자니 속도가 너무 느려져서 요격을 당할 위험이 생긴다. 이 때문에 공장에 대한 명중률이 5%를 넘기지 못하는 실망스러운 전과를 내었다. 일례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첫 번째 폭발 -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도 폭탄이 실제로 떨어진 곳은 예정지를 벗어난 곳이었다. 히로시마의 경우 보통 원폭돔이 타겟으로 알고 있을텐데, 사실은 원폭돔 근처의 T모양의 아이오이 다리였으며, 실제 그라운드 제로는 아이오이 다리에서 조금 빗나가고 원폭돔에서는 200여미터 떨어진 시마 외과병원 상공이었다. 날씨가 맑을 때도 이 정도인데, 흐릴 때는 말할 것도 없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두 번째 폭발 -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흐릴 때 투하한 나가사키에서는 3km나 빗나갔다.]] * 주요 전략타겟 몇 개만 부순들 큰 효과 없다. 전쟁 수행 능력을 꺾으려면 공장뿐 아니라 공장에서 일하는 '''[[민간인|전쟁 수행원]]까지 제거'''해야 한다. 소위 '''"무고한 민간인 따위는 없다(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라는 말이 이것이다. 하늘에서 아무리 폭탄을 쏟아부어도 [[인간 방패|민간인들을 동원해서 수리하고 악착같이 공장에서 군수품을 하나라도 더 뽑아내는 판국]]에는 폭격이 효과를 보기 힘들다. * [[필리핀 해 해전|적 해군이]] [[레이테 만 해전|사실상 전멸]]한 지금, 우리 해군 항모함재기들이 적극적으로 호위로 붙을 수 있다. 덤으로, [[이오지마 전투|이오지마 섬의 비행장을 확보]]하였으니 여기서 발진하는 장거리 호위전투기들로 B-29를 호위하여 안전고도 훨씬 아래로 폭격할 수 있다. * 커티스 르메이가 제21폭격기사령부로 오기 직전에 상관인 로리스 노스테드 준장[* 육군항공대 항공부참모장 겸 [[제20공군]] 참모장이었다. 당시 제20공군은 합참 직속으로서 [[헨리 아놀드]] 육군항공대사령관이 직접 제20공군사령관을 맡았고, 태평양해역 육군항공대사령관이 부사령관을 맡았다.]으로부터 받은 명령이 있다. 그 내용은 ''''[[몰락 작전|일본 본토를 침공해 들어가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본의 산업 역량 그 자체를 무력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핸셀과 르메이가 합쳐서 열 다섯번이나 고고도 정밀폭격을 가했던 무사시노 항공기 공장에 해군이 급강하 폭격기로 한번 저고도 폭격을 가했더니 지금까지의 결과를 합친 것과 거의 동일한 피해를 내었다. 독립된 폭격기 비행단과 값비싼 고고도 폭격기를 투입해도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유지할 이유가 없다.''' 이런 비효율적인 사례가 반복되면 '''항공 전력은 독립하지 못하고 육군과 해군에 계속 종속'''될 것이다. 이 때 제21폭격기사령부를 비롯한 미군의 모든 항공 전력은 육군비행단이나 해군에 소속되어있었다. 미공군이 탄생한 건 조금 더 뒤. 그러나 항공대 세력은 그대로 있다. 육군항공대의 일부가 갈라져 나온 것이 공군이며 육군항공대 자체는 그대로 있다. 해군항공대와 해병대 항공대 역시 바뀌지 않고 그대로 있다. 제독들의 단체 항명사건으로 인해 해군의 입지가 낮아진 건 사실이지만,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현대 미군 자체가 해방부적인 면이 강하다. 그리고 르메이가 고고도 정밀폭격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대규모의 폭격기를 저고도로 진입시켜 도시에 네이팜탄 도배를 해버리는, '''말 그대로 도시 지우기'''였다. 이 과정에서 당시 르메이의 참모로 재직하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자신의 장기인 통계분석과 가성비 짜내기를 이용해 지금까지의 폭격 성과를 분석한 끝에, 일본 열도를 효과적으로 폭격하기 위해서 고고도 폭격이 아니라 저고도 융단폭격이 더 효과가 좋고, 피해규모도 얼마 늘지 않는다는 분석결과를 제시해 르메이를 설특한다. 기체 및 파일럿의 피해가 급증할 것이 명백했으나 맥나마라는 손실이 크지 않다는 분석결과를 냈고, 어쨌든 르메이는 일본 본토 폭격을 전담하는 제21폭격기사령부의 사령관인데다 독일에서 나름 성과를 거둔 적도 있었기에 당장 B-29로 뭐라도 해야 면피가 가능한 육군 항공대의 절박한 사정때문에 르메이의 의견이 먹힐 수 있었다. 르메이도 무작정 부하들을 사지로 내모는 양반은 아니어서, '''일본군 야간 방공전 능력은 형편없고 그나마 있는 방공무기도 고공으로 조준하고 있으니 저공 목표를 제대로 타격하지 못할 것이다'''는 이유를 들며 첫 대공습을 야간에 실시하기로 했다. 그것도 폭격만 극대화 하려고 극단적으로 방어기총수도 내리고 기총도 떼버리고 단 1kg이라도 더 폭탄을 싣는 극한의 폭탄드랍을 준비한다. 1945년 기준으로 야간방공전 능력이 가장 탁월한 나라는 독일의 야간 공습을 효과적으로 저지하기 시작한 영국이었다. 1944년 1~4월에 걸친 독일의 야간 공습(일명 베이비블리츠)에서 독일은 500대 이상의 폭격기를 동원하였고 이중 320대 이상을 손실하는등 심각한 피해를 입은 반면 영국은 비전투 손실을 포함하여 29대의 항공기가 파괴되었으나 전투 손실은 1대 파괴, 5대 손상에 그쳤다. 독일의 경우 이쯤되면 슬슬 전력이 거덜날 시점이라. 1945년 3월 9일, '''346기의 B-29 폭격기가 이륙, 그중 279기의 폭격기가 1,600여 톤의 네이팜탄을 도쿄 시가지(스미다강 양안)에 뿌려댔다.''' 사망자만 8만에서 10만에 달할 정도였고, 건물 267,000여 채가 싸그리 잿더미가 되었는데 이는 당시 도쿄의 건물 중 25%에 달하는 수치였다. 바로 '''[[도쿄 대공습]]'''이다. 도쿄 대공습 이후에도 도쿄는 4월 초 및 5월 중순, 8월 초에도 수십여 기의 B-29로부터 집중폭격을 받았다. [[도쿄 대공습]]이 일본인들에게 끼친 심리적 영향은 해당 항목 참조. 그런 심리적 영향을 확인할 길이 없었던 미군도 도쿄 대공습의 성과에 크게 환호했는데 격추 14기에 손상 42기라는 생각보다 경미한 피해에다가, 항공정찰 사진 판독 결과 '''말 그대로 도쿄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지금까지의 시원찮은 공습과 달리 이제서야 '''제대로 된 피해'''를 주었다고 미군은 인식한 것이다. [[파일:/pds/1/200601/10/25/b0043125_21563099.jpg]] 작전이 성공한데다, 당시 결정적 한방을 갈구하던 미국의 여론이 잿더미가 된 도쿄의 사진을 보고는 이제야 속이 후련하다며 열광한 덕에[* 반면 3주전 [[드레스덴 폭격]]땐 어마어마한 여론의 공격을 받았다.] 여론의 지지까지 등에 업은 르메이는 일본측이 정신차리고 방공망을 재조정하기 전에 재빨리 타격할 계획을 세운다. 3월 11일에 310기의 B-29를 투입하여 [[나고야]]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나고야 공습은 폭격을 가한 범위가 도쿄보다 광범위한 덕에 피해는 적은 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거고 실제로는 5.3km²에 해당하는 도시 면적이 소각되었고 더군다나 폭격기 피해가 전무했다. 도쿄 대공습 이후 3월의 전략폭격은 다음과 같다. * [[도쿄 대공습|3월 9~10일 도쿄]]: 279기 투입. 사망자 8~10만. 건물 267,000여 채 파괴. 도시면적 41km² 전소. * 3월 11일 나고야: 310기 투입. 도시면적 5.3 km² 전소. * 3월 13~14일 오사카: 274기 투입. 도시면적 21 km² 전소. 사망자 4000여 명, 행방불명자 500여명 * 3월 16~17일 고베: 331기 투입. 도시면적 18 km² 전소. 사망자 8천. 이재민 65만여 명. * 3월 18~19일 나고야 2차: 도시면적 7.6 km² 전소. 1945년 3월 9일 있었던 대공습이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피해를 입힌 폭격이라 가장 유명하지만, '''폭격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3월 11일 [[나고야시|나고야]], 13일 [[오사카시|오사카]], 16일 [[고베시|고베]], 19일에는 다시 나고야가 르메이의 3월 1차 공습의 표적이 되어 총 82km² 면적이 지도 위에서 재로 사라졌다. 이로써 '''일본의 주요 공업 도시들이 단 열흘 만에 모조리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이중에서 3월 13일~14일에 이뤄진 오사카 공습이 절정이었다. 일본 제2의 도시이자 최대 상공업 거점이었던 오사카를 [[미군]]이 놔둘 리 없었고, 폭격기 274대로 소이탄 1,700여 톤을 퍼부어 오사카 항구를 포함해 약 20km²의 시가지를 파괴했다. 이 당시 [[오사카 성]]도 완파당했다. 다만 오사카 성은 이미 19세기에 벼락으로 [[천수각]]이 완파되어 1931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복구된 것이었기 때문에 문화재적 가치는 당시에도 높지 않았다. 당시 오사카의 가옥 13만 여 채가 완파되었지만 도쿄에 비해 대체로 소방 방재가 잘 이루어졌고 오사카 시민들도 도쿄 대공습의 소문을 들은 바 있었기 때문에 인명피해는 사망자 4천여 명, 행방불명자 5백여 명으로 도쿄에 비해선 경미한 수준이었다. 이때 폭탄이 오사카의 육군 병기창에 명중, 대폭발을 일으켜 2,000m 상공을 비행하던 폭격기를 고도 3,600m까지 날려 버린(!) 에피소드도 있다. 해당 폭격기는 실속 상태에 빠져 하강했으나 조종사가 상황을 수습해 600m 고도에서 정상 비행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오사카는 종전 전까지 7차례의 대폭격을 더 당한 끝에 도시 전역이 초토화되었다. 현재 [[오사카 성]] 남쪽 경내에 있는 오사카 국제평화센터(피스오사카)에 가면 당시 사료들과 재현 모형 전시물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순식간에 여러 도시에 폭격을 퍼부은 까닭은 [[일본]]이 B-29의 저공 비행에 대한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 전에 공업시설을 최대한 무력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나카지마 항공기,무사시노 제작소,미쓰비시 제작소등 당시 일본 항공기 제작소,부품공장들은 이렇게 대도시 주변에 붙어있었기 때문에 여기가 집중 타겟이 되었고 어찌나 폭격을 퍼부어 댔는지, 약 1주일 후인 3월 19일에 마지막으로 나고야를 폭격한 뒤에는 잠시 폭격을 멈춰야 했다. 장병들에게 휴식 시간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있던 소이탄 물량을 다 썼기 때문이었다.''' 도쿄 대공습 이전 정밀 폭격 작전에 쓰인 폭탄의 비율은 대략 고폭탄 60%에 소이탄 40%였다. 이런 폭장 비율과 폭격 소티(sortie) 수를 따져 보면 당시 르메이가 보유하고 있던 소이탄은 약 2달 동안 쓸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르메이는 '''고폭탄은 집어치우고 소이탄 100%+소이탄의 불길 확산을 위한 기름폭탄'''이라는 비범한 작전을 실시했다. 도쿄대공습 이후 10일 동안 르메이는 무려 150만발에 해당하는 소이탄 1만톤을 퍼부어 일본의 주요 대도시를 휩쓸었다. 르메이가 "소이탄을 더 보급해 달라"고 요청하자 "그 많은 양을 다 썼을 리가 없다"며 비웃었던 해군도 도쿄가 불바다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부랴부랴 소이탄을 실어 날라다 주었다. [[오키나와 전투]]로 인해 4월에는 잠시 주춤했지만 공습은 계속 이어졌다. 2달치 소이탄을 싹 써버려서이기도 하고 더 결정적인 이유는 [[오키나와 전투#s-4.3.1]] 문서와 [[카미카제]] 문서를 참고할 것. 1945년 4월 1일, 도쿄의 나카지마 항공기 엔진 공장이 B-29의 폭격을 맞았고 4월 3일, 시즈오카와 간토에 위치한 엔진 공장이 공습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작전은 야간 작전이어서 명중률이 떨어졌고 성공적이지 못했다. 4월 4일, 소규모의 B-29들이 도쿄와 가와사키를 폭격했다. 가장 성공적인 작전은 4월 7일에 있었던 작전이었는데 [[이오지마]]에서 본격적으로 배치된 [[P-51 머스탱]]들이 호위기로 동참하면서 부터였다. 이때 달려들던 일본기들은 101대나 격추되어버렸다. 이때는 요격기들을 머스탱이 상대할 수 있었으므로, 아예 당당하게 주간에도 출격해 백주대낮에 고폭탄을 주요 군수시설에 쏟아붓는 식으로 폭격을 가했다. 4월 12일, 무사시노 항공기 공장에 대한 대규모 폭격이 가해졌고 그 과정에서 185기의 일본기들이 격추되었다. 4월 13일, 도쿄에 또 다시 대규모 폭격이 가해졌고 무기 공장을 비롯한 30km²의 면적이 파괴되었다. 4월 15일, 수도권에 대규모 폭격이 가해졌고 도쿄 면적 16km²,가와사키 면적 3.9km², 요코하마 면적 3.9km²가 파괴되었다. 4월 24일에는 도쿄 인근의 타치카와 엔진 공장이 박살났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해방 된 5월 이후부터 공습은 더 큰 규모로 전개되었다. 5월 5일, 구레 인근의 히로 해군 항공기 공장이 파괴되었고 10일에는 이와쿠니, 오시마, 도야마의 연료 저장고가 파괴되었다. 13일에는 나고야에 대규모 폭격이 진행되었고 나고야 면적의 8.2km²가 파괴되었다. 16일에 재공습이 가해졌고 나고야 면적의 9.9km²가 파괴되었다. 두 번의 공습으로 나고야 시민 3866명이 사망하고 47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되었다. 5월 19일에는 타치카와 항공기 공장을 대규모로 폭격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5월 23일과 25일에 걸쳐서 도쿄에 두 번의 대규모 폭격이 이어졌고 총 58km² 면적이 파괴되었다. 이 공습을 기점으로 황궁을 비롯한 일본 정부 기관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미국은 히로히토를 죽일 생각이 없었으므로 추가적인 폭격이 이어지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도쿄의 절반이 넘는 면적(50.8%)이 파괴되어''' 더 때려부실 곳이 없다는 이유로 미국의 폭격 리스트에서 제외되었다. 5월 29일, 요코하마에 대규모 폭격이 이어져 18km²의 면적이 파괴되고 1000명이 넘는 일본인이 사망했다. [[파일:/pds/1/200601/10/25/b0043125_21322727.jpg|width=100%]] (5월 24일 있었던 재공습으로 간판만 빼고 홀라당 다 타 버린 도쿄의 천황궁 [[고쿄]].) 당시 [[일본 제국 육군|일본 육군]]과 [[일본 제국 해군|일본 해군]]과 민정문관 및 [[일본제국 경찰]]과 경찰 소방대와 [[의용소방대]]를 포함해 약 1만 명이 소방차 40대를 동원하여 '''주택가가 활활 타는''' 약 4시간 동안 불을 끄기 위한 작업을 벌였으나, 세이덴(正殿)을 포함해 27동이 홀라당 다 탔다. 천황가 [[삼종신기]]는 이때 도쿄 궁성에 보관되어 있지 않아 참화를 면했다. [[쇼와 덴노]]는 도쿄가 폭격을 받던 기간 내내 [[일본 황실]] [[도서관]] 지하 방공호에 짱박혀 있던 덕분에 무사했고, 전쟁 끝날 때까지 계속 거기서 살아야 했다. [[파일:Taihoku_Air_Raid_1945.jpg|width=100%]] (5월 31일 공습을 받은 다이호쿠(현 [[타이베이시|타이베이]]) 시가지, 폭격을 받은 [[대만총독부]] 청사[* 사진 하단 가운데에서 약간 왼쪽에 있는, 옆으로 눕힌 日자 모양 건물이다.] 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5월 31일에는 일본 본토뿐 아니라 [[대만일치시기|일본령 대만]] [[타이베이시|다이호쿠시]]에도 117기의 [[B-24]]에 의한 대규모 폭격이 가해져(타이베이 대공습) [[대만총독부]] [[총통부(대만)|청사]],[* [br][[파일:二戰時被轟炸過的臺灣總督府.jpg|width=100%]][br]당시 폭격으로 인한 파손과 화재로 매우 심한 손상을 입어, 전후 1948년까지 3년에 걸쳐 수리를 진행해야 했다.] 용산사, 단수이 극장, 대만철도호텔 등의 건물이 파괴되고 3000여 명이 사망하였다. 6월 1일, 오사카에 대규모 폭격이 가해져 3,960명이 사망하고 8.2km²의 면적이 파괴되고 5일에는 고베에 대규모 폭격이 가해져 11.3km²의 면적이 파괴되었다. 7일, 오사카에 재공습이 가해져 5.7km²의 면적이 파괴되고 15일에는 4.9km²가 파괴되었다. 그 과정에서 아마가사키 까지 폭격을 맞아 1.5km² 면적이 파괴되었다. 6월까지의 공습 기간 동안 총 12만 명 이상의 일본인 및 재일 조선인들이 사망했으며 1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270km²의 면적이 파괴되었다. 이는 [[독일 본토 항공전]] 당시 연합군이 파괴한 독일 면적보다 높은 수치였다.(200km²) 미국의 손실은 B-29 136대 손실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때 르메이와 21폭격기사령부 지휘부는 '''더 이상 때릴 대도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6월 중순, 사이판에서 [[헨리 아놀드]]와 만난 르메이는 협의 끝에 '''대도시는 그만. 이제 중소도시를 폭격한다!'''는 합의를 한다. 그리고 6월 중순부터 8월 초순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웬만한 도시에는 빠지지 않고 B-29가 출현하기 시작한다. 6월 9일, 나라오와 아츠다의 항공기 공장들이 B-29의 공습으로 대파되었다. 아카시의 가와사키 항공기 공장에도 공습이 가해졌지만 인근 마을이 피해를 입었다. 다음 날에는 도쿄 만의 6개의 공업 지대가 파괴되었다. 17일에 시즈오카의 하마마츠 그리고 가고시마, 오무타, 요카이치 지역에 대규모 소이탄 공습이 가해졌다. 15.73km²의 면적이 파괴되었고 시즈오카는 잿더미가 되었다. 19일에는 후쿠오카, 시즈오카, 도요하시가 소이탄 공습을 맞았다. 6월 22일, 대규모의 [[B-29]]들이 서일본의 구레, 카카미가하라, 히메지, 미즈시마, 아카시를 폭격했다. 타겟이 된 대부분의 공업지대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24일에는 오사카와 나고야 인근의 공업지대에 폭격이 가해져 4개가 대파를 입었고 26일에는 혼슈와 시코쿠의 공업지대에 대규모 폭격이 가해졌지만 구름으로 인해 명중률이 떨어져 피해는 적었다. 28일, 모지와 노베오카 그리고 오카야마와 사세보가 소이탄 공습을 맞았다. 7월 1일, 구마모토와 구레, 시모노세키와 우베가 소이탄 공습을 맞았다. 3일에는 [[히메지시|히메지]], [[고치시|고치]], [[타카마츠시|타카마츠]], [[도쿠시마시|도쿠시마]] 지역이 폭격을 맞았고 6일과 9일에는 [[아카시시|아카시]], [[지바시|지바]], [[고후시|고후]], [[시즈오카시|시미즈]][* 현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시미즈구 등. 나중에 시즈오카시와 합병된다.] [[기후시|기후]], [[사카이시(오사카)|사카이]], [[센다이시|센다이]], [[와카야마시|와카야마]]가 소이탄 공습으로 초토화 되었다. 7월 10일에는 도합 2천 대에 이르는 폭격기가 동원된, 개전 이래 가장 큰 규모의 합동폭격이 결행되었다. B-29 500대 이상이 오사카 근교 [[와카야마현]]과 사카이현, [[나고야시]] 근처의 요카이치에 있는 정유소, 나고야 배후의 [[기후시|기후]], 도쿄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센다이시|센다이]]를 차례로 폭격했다. [[함재기]] 1천여 대는 도쿄 주변의 비행장을 때렸으며, 300대는 [[규슈]]의 비행장을, 나머지 항공기들은 오사카와 나고야를 폭격했다. 12일에는 이치노미야와 츠루가, 우츠노미야에 공습이 가해졌고 16일에는 히라츠카, 쿠와나, 나마즈, 오이타가 폭격을 맞았다. 19일에는 초시, 후쿠이, 히타치, 오카자키에 공습이 가해졌다. 26일에는 마츠야마, 오무타, 도쿠야마가 잿더미로 변했다. 그렇게 폭격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파괴할 것조차 없겠다고 여길 정도가 되었다. "폭탄은 떨어진 곳에 다시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도쿄 사람들은 절대 믿지 않았다. 1945년 3월부터 7월까지 4개월 간 [[미국]]은 9만 톤에 가까운 폭탄을 [[일본]]에 투하했고, 도시 26개, 총면적 330km²를 초토화했다. 건물 250만 동이 소실되었으며, 산업생산량은 1944년에 비해 약 40% 수준으로 떨어졌다. [[석탄]]생산량은 절반, 정유량은 15%, 항공기 엔진은 25%, 총포, 화약은 45%, 알루미늄은 9%로 생산량이 떨어졌다. 그 동안 약 50만 명이 폭격으로 죽었고 1,300만 명이 집을 잃었다. [[반딧불이의 묘]]처럼 옥외생활 및 식량부족 때문에 죽은 사람은 파악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최대 사망자가 '''100만 명 대로 추산되기도 한다.''' 일본이 항복을 안하자 8월 1일, '''[[B-29]] 836대가 동원되면서 2차대전 중 가장 많은 항공기가 동원된 공습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단순히 폭격기의 숫자만 따지만 밀레니엄 작전 당시 영국이 실시한 쾰른 폭격에 투입된 폭격기가 868대로 더 많기는 하지만 이들 중 4발 중폭격기의 비중이 높지 않고[* 햄덴 같은 구식 기체까지 박박 긁어모아 투입했고 정비공장에서 파손된 기체까지 살려내어 총 출격 대수는 1,034대가 되어서 밀레니엄 작전이라고 부른다. 이 중 폭격기는 총 868대로 나머지는 호위 전투기까지 다 합친 숫자.] 빅커스 웰링턴 같은 물건까지 포함된 수치라 B-29로 836대를 동원한 것에 비하면 실질적인 전력은 밀린다고 봐야한다. 다수의 폭탄과 기뢰가 부설되었고 하치오지, 미토, 나가오카, 토야마가 초토화되었고 특히 토야마는 '''99.5%의 건물이 파괴되는 수준의''' 문자 그대로 지도 상에서 지워지는 수준의 피해를 입었다. 8월 5일, 이마바리, 마에바시, 니시노미야, 사가에 공습이 가해졌다. 일본이 항복하기 전날인 8월 14일에는, [[아키타시]]에 B-29 134기가 동원되어 전쟁 마지막 대단위 공습을 가했다. 아키타의 소규모 유전과 정유시설을 목표로 한 공습이었고 유전, 정유시설, 항만이 완전 파괴되었고 이에 인접한 시가지가 모조리 전소되었으며 250명 이상이 폭격과 이로 인하 화재로 사망했다. 그리고 이렇게 일본 전역이 개박살나는 와중에도 '''몇몇 도시들은 이상할 정도로 폭격을 맞지 않았는데''', [[교토시|교토]], [[니가타시|니가타]], [[기타큐슈시|고쿠라]] 그리고 '''[[히로시마시|히로시마]]와 [[나가사키시|나가사키]]'''였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일본 제4의 도시였던 교토와 군수공업 중심지였던 히로시마가 멀쩡했던 까닭을 많은 사람들이 무척 궁금해 했다. 일본인들 뿐 아니라 미군의 커티스 르메이 역시 교토를 포함한 이 도시들을 폭격하지 않는 까닭을 따지고 들었다. "교토야말로 최고의 목표인데 대체 왜 못 때리게 하는지 모르겠다"며 몇 번이고 육군부 장관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다.[* 물론 당시 핵의 존재가 철저히 기밀이었는지라 르메이를 포함한 미군 지휘부 역시 첫 핵폭격 이후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여간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이 행운(?)의 도시들은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는데, 그들은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야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그 숨은 까닭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대규모 공습 직후 르메이는 일본 전역에 [[히로시마의 경고문|당당하게 폭격 경고문]]을 돌린 다음 그동안의 전과를 분석하며 추가 작전을 준비했다. 경고문에 대한 내용은 [[히로시마의 경고문#s-2|문서]] 참고. 4월 동안에는 미군이 기아 작전([[http://en.wikipedia.org/wiki/Operation_Starvation|Operation Starvation]])의 일환으로 일본의 항만도시에 만 2천여개의 [[기뢰]]도 부설하였다. 그 결과 종전 직전까지 기뢰에 의해서만 백만톤이 넘어가는 일본의 수송선단이 침몰당했고, 기뢰를 피하려다 잠수함에 당해버린 배도 부지기수였다. 이렇게 일본의 원자재 수입량은 '''80% 이상 감소'''하였다. 이는 원자재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던 일본 군수 산업의 목에 올가미를 조여버린 조치였다. 또한, 외부 점령지로부터의 식량 수입도 덩달아 감소하면서 일본 내 식량난이 크게 심각해졌다. 상세한 건 상기 링크 및 아래 항목을 참고하자. 언급된 도시만 봐도 규슈 남단의 가고시마에서 혼슈 최북단 아오모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중소도시가 모조리 공격받았다. B-29의 공격을 받지 않은 곳은 [[홋카이도]]와 [[일본령 가라후토]](현재의 [[사할린]] 섬 남부) 정도였다. 대신 홋카이도는 아래 따로 서술할 미 해군 항모기동부대의 폭격과 전함부대의 포격을 받았다.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도 부산이나 제주, 원산, 함흥 등에 소규모의 폭격을 받았다. 가라후토의 경우 경제적 가치가 전무했고 미군 기지로부터 거리가 매우 멀어 폭격을 받지 않았기에 이 소문을 들은 적잖은 일본인들이 가라후토로 피신했는데 몇 개월 후 B-29 폭격기 못지 않게 [[소련군|무서운 손님]]이 찾아오게 된다. 한편 이런 전략폭격과는 별개로 6월 하순 사이판에 전개한 315 폭격비행대는 역시 B-29를 기종으로 쓰고 있었으나 당시 미국의 모든 기술력이 결집된 최첨단 정밀폭격기기를 갖추고서 야간폭격에 돌입, 일본 전국에 산재한 주요 정유시설을 정밀폭격하였다. 그러나 워낙 르메이의 초토화 폭격의 인상이 강해 전쟁 중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전후에는 '''분석해 보니 정제할 기름도 거의 없는 곳에 폭격했다'''고 하여 묻혔다. 이미 1944년 이후 남방 점령지와의 해운이 완전히 끊겨서 일본의 석유 수급은 0에 가까웠다. 이렇게 된 것은 일본의 석유 수송로 자체를 미 해군이 잠수함과 항공모함 등으로 다 끊어버렸기 때문. 315 비행대도 상대적으로 더할 뿐이지 공습의 성과가 없으면 가차없이 대단위 공습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전쟁 최후의 공습인 8월 14일 아키타시 공습이 바로 315 비행대에 의한 것이다.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역시 B-29에 의해 이루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